허지웅의 '진보 예수는 없다' 라는 글은 서로 다른 전통이 경합하고 삼투되는 복잡한 서구사상의
전개과정과 현실의 인간의 욕망이 개입하는 역사의 전개과정을 무시한채, 초기의 소박한 실증주의에 경도된 계몽주의 시대의 상투적
도식을 반복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나 역시 종교의 과학적 진실 여부에 대해서는 회의적 입장을 취하고 있음에도, 허지웅과 같은
방식의 타박은 매우 소박한 것이며, 더 나아가 위험한 것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
허지웅의 지적대로 확실히 현재
유통되고 있는 예수의 신화는 상당부분 조작된 것이며 복음의 역사는 곧 권력의 역사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가 망각하고 있는 것은
종교 뿐만이 아니라 모든 사상은 실체가 없는 해석의 향연이라는 점이다. 그에 따르면 예수는 실체가 없기에 끊임없이 해석만 난무하는
차연의 기표이지만, '진보, 자유, 이성' 과 같은 개념들 역시 그 기의는 차연된다는 점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창조론과 같은
경험적 해석의 문제에 있어서는 종교가 실증주의적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을지언정, 가치의 문제에 있어서는 그 '비실체성' 을
문제로 삼기 위해서는 좀 더 치밀한 논증이 필요하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허지웅은 예수가 실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해석의
견해차가 크다는 주장을 하지만, 예수와 달리 시장은 오늘날 현실에 존재하지만 신자유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의 시장에 대한 견해
차이가 보수 기독교와 진보 기독교의 차이보다 좁아 보이지는 않는다.
또한 허지웅의 논의에서 사용되는
'진보(progress)' 라는 개념은 매우 불명확하고 자의적 개념이기에 이를 잣대로 기독교를 판단하는 것은 별로 논리적 설득력이
없다는 점을 지적하고 넘어가야겠다. 진보는 어디까지나 상대적 개념이기에 역사적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법이며, 그것은 특정한 구성
요소들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이념에 따라 구체적 내용이 달라지게 된다. 즉, 신자유주의자와 사회주의자는 모두 역사의
진보를 신봉한다는 점에서 진보주의자들이지만 신자유주의자에게 있어 자본의 무한증식과 자기조정적 시장의 전사회적 관철이 진보를
의미한다면 사회주의자들에게 있어서는 생산수단의 국유화와 시장의 철폐가 진보를 의미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서로 다른 지향점을
가지는 두 개의 집단 중 어느 한쪽을 더 진보적이라고 단정지어 말하기 어렵다. 따라서 자신의 머릿속에 존재하는 '단 하나의 진보'
를 기준으로 기독교를 판단하여 선고를 내리는 허지웅의 독단은 논리적 설득력을 갖추기 어렵다.
특히 동의할 수 없는
점은 유일신 신앙의 배타성은 '진보주의자(앞 문단에서 이 단어가 뜻하는 것은 '허지웅이 좋아하는 이념을 지닌 사람' 이상이 될 수
없다는 점을 밝혔지만 이제부터는 논의의 편리를 위해 잠시 '정치적 좌파' 의 동의어로 쓰기로 하자)' 의 선택이 될 수 없다는
점이다. 이러한 논리를 수용한다면 진보주의자는 포스트모더니즘을 공부하다 주화입마에 빠진 반지성주의자 쯤이 될 것인데, 모든 학문적
논의는 자신만의 진리를 전제하고 이루어진다는 점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허지웅의 정의를 수용한다면 모든 '~주의자' 들은
진보적이지 않다. 아니, 우선 보수적 신념을 유효하지 않은 것으로 돌리는 진보주의자부터가 진보적이지 않다. '한 가지의 진리' 의
존재 여부가 논리적으로나 경험적으로만 '진보성' 를 결정해주지는 않는다. 좌파의 입장에서 지양해야 할 것은 해석의 독재과 신앙의
강요지 진리의 단일성은 아니다(따라서 신에 대한 독단적 해석과 전투적 포교를 고집하는 종교적 근본주의는 비판받을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유일신이 존재한다면, 사후에 신의 면전에서 '당신은 혼자 존재하니 당신의 존재 자체가 반동적' 이라고 삿대질을
할텐가?
더욱 문제가 되는 점은 허지웅이 생각하는 '근대' 나 '진보' 의 주를 이루는 이념의 상당부분은 기독교
사상에 빚지고 있는 바가 크다는 점이다. 예컨대 중세시대 세속적 지배의 영역과 영적 지배의 영역 간의 구분은 아퀴나스에 의해
재검토되었는데, 그의 견해에 따르면 군주의 지배는 자연법-즉, 인간의 이성에 드러나는 '신법(eternal law)의 일부'-을
군주가 준수하는 한도 내에서만 정당화된다. 국가는 종교적 교의를 해석하는 권능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따라서 교회는 통치자에 대해
'심판하는 위치' 에 설 수 있다. 나아가 통치자가 자연법을 재삼재사 침해한다면 그에 대한 반란은 정당화된다. 따라서 비록
궁극적 관심사가 기독교 공동체의 발전에 있었다 하더라도, 자유 민주주의 전통이 발전하는 데 핵심이 되는 제한정부의 사상은
아퀴나스에 의해 일찍이 제시되었던 셈이다. 과연 기독교가 없었다면 현대 자유 민주주의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로크의 사상이 나올 수
있었을까?
이와 더불어 중세 초기에는 대부분의 사람이 생존 수준 이하의 삶을 살아가는 계급사회였지만, 그런
세계에서 '신 앞에서 인간의 평등' 이라는 기독교의 주장은 어느 누구도 도덕적, 정치적으로 우월한 권리를 갖지 않는 공동체의
가능성을 내비치면서, 사회 전체적으로 정치적 평등의 가치가 유지될 수 있었던 유일한 기반이었으며, 그런 상황에서는 종교적으로
평등을 꿈꾸는 것은 최소한 보다 나은 삶의 비전을 유지하는 한 방법이었다. 대부분의 역사적 사건과 이념들에는 양가성이 있다는 점을
잊으면 안된다. 더욱 중요한 점은, 허지웅이 진보적 성인(聖人)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정치에서의 진보를 원한다면(최소한
나에게 있어서는 전자는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이 글의 내용은 그와는 상반되는 관점을 취하고 있다는 점이다. 현실정치에서
중요한 것은 심정윤리가 아니라 책임윤리이다. 허지웅의 머릿속이 아닌 현실에서는 해방신학을 신봉하는 '위선자' 의 반독재투쟁이
쿨하게 종교를 거부하는 '진정한 패션좌파' 의 칼럼질보다 훨씬 유익하며 선한 결과를 낳는다.
역사와 사상에 대해
조금이라도 진지하게 고민해 보았다면 저차원의 반(反)기독교주의와 세속주의 및 반교권주의(反敎權主義)를 구분하지 못하는 이러한 글이
나오기는 어렵다. 나로서는 이러한 경향은 소위 패션좌파의 필연적 귀결로 보인다. 80년대의 거대담론과 90년대의 환멸 및 개인
내면으로의 침잠을 극복할 새로운 주체가 나오지 않은 상황에서 등장한 00년대의 패션좌파는 '노동해방문학' 과 '사소설' 을 모두
쓰지 못하는, 끝없는 악세사리로 자신을 치장하는 주체로 파악되며, 이러한 가벼움은 그 동안의 역사를 만들어왔던 모든 묵직한 것들을
가볍게 비웃을 수 있는-중요한 점은 진지한 성찰과 치밀한 자료조사 없이, 단순히 자신의 즉자적 감수성에 의거하여 이를 행한다는
점이다- 무모함과 경박함으로 나타난다. 자, 예수의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정치상황과 물질적 조건이 모두 열악한 라틴 아메리카에서
죽음의 위기를 무릅쓰고 인민과 연대하는 성직자와, 민주화된 남한에서 중산층의 문화인 영화를 보며 그에 대한 해석만 써제끼며 모든
해방신학자와 기독교 사회주의자들을 기본적인 공부조차 하지 않은 채 '반진보주의' 로 낙인찍는 사람 중 어느쪽이 더 '위선적' 이고
'코미디' 일까?
